목록심재현의 문학과사람들 (5)
소풍, 그리고....
그대 보고 싶은 마음 죽이려고 산골로 찾아갔더니, 때아닌 단풍 같은 눈만 한없이 내려 마음 속 캄캄한 자물쇠로 점점 더 벼랑끝만 느꼈습니다 벼랑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가다가 꽃을 만나면 마음은 꽃망울 속으로 가라앉아 재와 함께 섞이고 벼랑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조정권 시집「비를 바라보는 일곱가지 마음의 형태」중 "벼랑끝" 전문
상한 영혼을 위하여 /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고정희 #상한영혼을위하여 #심재현의문학과사람들
접기로 한다 / 박영희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 순간, 햇살에 배겨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박영희 #접기로한다 #심재현의문학과사람들
시간의 중량 / 정진경 남자 몸에 시간이 연결되어 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몸에서 흐르는 시간은 5톤짜리 크레인 하중 걸어도 뛰어도 속도가 일정한 시계를 남자는 장착하고 있다. 병실 바닥에는 추락한 혜성의 꼬리 밥알들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다. 빠른 속도로 추락한 것들을 줍고 있는 남자, 느려진 심장박동 신경 회로에서 발원하는 무게의 중량감이 그를 지면으로 끌어당긴다. 창문틀 안 하늘은 궁륭처럼 높아 슬프게도 푸른데, 남자의 시선은 아래로만 치닫는 경사면을 본다. 탱고의 빠른 리듬을 잃은 일상 시간에 굶주렸던 몸이 살풀이를 한다. 한 숨 한 숨의 느린 호흡으로 한 끼 식사를 한다. 시간이 늘어지고 있는 몸 시계, 생명이 째깍거린다. ----------------------------------------..